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산조 덴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045년, 이복형 [[고레이제이 덴노]]의 황태제로 책봉되었으며, 후지와라노 요시노부(藤原能信)의 양녀인 모시/시게코(茂子)와 혼인했다. 1068년, 형 고레이제이 덴노가 붕어하자 즉위했다. '''171년 만에 [[후지와라]]씨의 외손이 아니면서도 등극했으며,''' 당시 후지와라노 아소미는 관백인 '''후지와라노 요리미치'''(賴通)와 '''후지와라노 노리미치'''(敎通) 형제간의 내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[* 둘 다 고산조 덴노의 형인 [[고레이제이 덴노]]의 장인이었고, 관백이다 보니까 서로 세도(勢道)를 다투게 되었다.] 고산조 덴노는 '''천황의 권력을 강화하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.''' 즉위 이후 반(反)섭관가의 선봉으로 동궁 시대부터 천황을 비호하고 있었던 '''후지와라노 요시나가'''(藤原能長)와[* 외척으로 섭관정치의 절정을 누렸던 '''[[후지와라노 미치나가]]'''의 손자였고, 후지와라노 요리무네(藤原賴宗, 차남)의 아들이었으나 숙부였던 후지와라노 요시노부(藤原能信, 4남)의 양자가 되었다. 또한 상술한 두 관백 요리미치(장남)와 노리미치(5남)의 조카였다. 엄연한 섭관가의 일원이 반섭관가의 선봉이라는 것이 앞뒤가 안 맞고, [[세도정치]]에서 [[신 안동 김씨]]나 [[풍양 조씨]]가 이랬다는 얘기도 없어서 낯설지만 친형제끼리도 서로 권세를 다투는데 조카라고 봐 줄 리가 없었다. [[덴지 덴노]]도 [[을사의 변]]에서 [[소가노 이루카]]를 처단하기 위해 종제인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를 포섭했다.] '무라카미 겐지'의 '''미나모토노 모로후사'''(源師房) 등을 등용해 후지와라노 아소미의 정권 독점 타파를 도모했으며, '''후지와라노 사네마사'''(藤原實政)[* 후지와라노 아소미 14세손으로 후지와라노 마나츠(藤原眞夏)의 운손자(雲孫子)였고, 요리미치·노리미치 형제의 7종질(七從姪: 17촌 조카)이었다. 후지와라노 아소미가 후지와라노 아소미의 정권 독점 타파에 나서는 것도 앞뒤가 안 맞지만 형제끼리도 싸우고 조카가 반기를 드는데 17촌이나 되면 [[종족#s-1|겨레붙이]]라 할지라도 국물도 없을 게 뻔하다. [[흥선대원군]]이 [[신 안동 김씨]]의 정권 독점을 타파하면서도 [[김병학]]과 [[김병국]]을 등용했던 일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.] 등의 하급 관리 등을 등용해 적극적으로 친정을 실시했다. 1069년, '''엔큐의 <장원 정리령>'''을 발포하고, '''기록장원권계소'''를 설치했으며, 1070년에는 견포 제도, 1072년에는 엔큐 선지승이나 <고가법>의 제정 등 율령제도의 형해화에 의해 약체화된 천황가의 경제 기반의 강화를 도모했다. 특히 '엔큐의 <장원 정리령>'은 지금까지의 정리령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치밀함과 공정함을 보였고, 그 때문에 기준 외의 섭정령이 몰수되는 등 후지와라 섭관가의 경제 기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. 그 당시 기록장원권계소는 장원을 보유한 사람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. 이 일이 국가와 장원 영주, 농민에게 안정을 가져와 '''엔큐의 선정'''이라 부른다. 반면 후지와라 섭관가는 내분때문에 고산조 천황을 상대로 적극적인 대항을 할 수 없었다. 또 이때 벌어진 '''엔큐 [[에조]] 전투'''에서 쓰가루 반도와 시모키타 반도까지 혼슈 전 국토가 조정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등 지방에서도 착실하게 영향력을 뻗어나가게 되었다. 1072년, 즉위 4년째에 황태자인 장남 [[시라카와 덴노|사다히토 친왕]]에게 황위를 넘겨주고, [[인세이]](원정)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병으로 쓰러져서 1073년에 붕어했다. '''이때의 양위는 상황이 국정을 다스리는 [[인세이]](원정)의 선례를 남겼다'''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